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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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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장군 김창집 이건영 이이명 박명룡 조태채 김대건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이동녕 차이석 김구 조성환 장형 박목월 함석헌

 

남이 1441-1468
조선시대의 무신. 1457년 17세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며 1457년 이시애의 반란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적사 공신1등에 책록되었습니다. 1468년 평소 그의 승진을 질투하던 유자광이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모함하여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당했습니다.
이시애의 난 토벌 당시 용산에서 정병을 모집,훈련시켰고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당한 연유로 용산에 사당을 짓고 매년 음력 4월1일, 10월1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김창집 1648~1722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노론4대신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1750년(숙종31) 지돈녕부사를 거쳐
이듬해 한성부판윤,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을 지내고, 1712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으며, 1717년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숙종이 죽은 뒤 영의정으로 원상이 되어 서정을 맡았습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뒤 관직에
복직되었으며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이건명 1663~1722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노론 4대신의 한사람입니다. 본관은 전주입니다. 이조판서, 부제학, 형조, 예조의 판서등 요직을 두루거쳤습니다.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승진하여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제책봉에 진력하다 이로 인하여 반대파인 소론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주청사로 청나라에 가 있으면서 세자책봉을 요청하는 명분으로 경종이 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를 가까이하지 못하는 병이 있다고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사사되었습니다.

 

이이명 1658~1722
조선후기의 문신·학자이며 경종 원년의 신임사화 때 희생된 노론 4대신 중 한 사람입니다. 본관은 전주, 자는 지인 또는 양숙, 호는 소재입니다.
1686년 숙종 12년 문과중시에 내과로 급제하고 강원도 감찰사가 되었습니다. 송시열등의 지원 안래 노론의 기수로 활약하였습니다. 1708년 숙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으면서 좌의정에 올라 세자<뒤에 영조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다 실패하기까지, 약 15년 동안을 노론 정권의 핵심적 존재로 활약하였습니다.
1702년 숙종이 죽자 고부사로 청나라에 가서, 북경에 있던 독일 신부 쾨글러(Koegler), 포르투칼 신부 사우레스(Saurez)등과 교류했고 천주교·천문·역산에 관한 서적을 얻어가지고 이듬해 귀국하여 이를 소개하였습니다. 이해(1721년) 왕의 명을 조작하여 발설하고 이를 이유로 대리청정케 했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이듬해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이천기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북호룡의 무고로 서울로 압송되어 사사되었습니다. 당대의 석학으로서 성리학에 정통했으며 특히 청나라의 실학사조에 관심이 깊어 이를 소개했으며 서학에 대해서도 연구했는데 저서로는 시·문을 엮은 <소재집> 20권이 있습니다.

 

조태채 1660~1772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노론4대신중 한사람입니다.
1686년(숙종12)별시문과에 내과로 급제하여 한성판윤, 호조, 공조, 이조의 판서를 거쳐 1717년 우의정이 되었다. 그는 도량이 크고 사려가 깊으며 해학을 즐겨 담론을 잘 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족질이 대부분 소론에 기운데 반하여 유독 노론에 머물렀습니다.
1721년 연잉군(뒤에 영조)의 세제책봉을 건의하여 실현시켰으나, 소론의 적극적인 반대로 대리청정의 명이 철회되고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등 노론4대출신을 축출하자는 소가 승정원에서 채댁되어 진도에 유배된뒤 사사되었습니다.

 

박명룡
본관은 진주로 서부 도저동에서 생장하였으며, 정확한 생몰년대는 알 수 없지만 정조, 순조대에 살았다는 것이 그의 선행을 기려 비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박명룡시은적덕비」는 용산구 한남동 산 10번지에 있는데 순조 7년(1807)에 세워졌습니다. 그 비문을 보면, 그는 성품이 관대하고 어질었으며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남의 재난을 구제하고 즐겨 은혜를 베푸는 일을 자신의 일로 여겼으니 그 가운데 큰 것들만 들어보면 이러합니다. 계축년<정조17년>기근이 연거푸 들어 조정에서 마을의 어려움을 모두 구제할 형편이 못되었을 때 그의 가산을 털어 구호에 힘썼고 가을에 국가에서 빌린 쌀을 갚을 힘이 없는 수백명의 기민들을 위해 대신 갚아 주었습니다. 이듬해 갑인년<정조18년>에는 한달이 넘는 장맛비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자가 잇따르자 가산을 기울여 땔나무와 식량을 마련,수백명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는 부유한 자도 아니고 오히려 자신의 가산도 넉넉하지 못하여 거친 음식도 먹지 못할 정도였는데도 이와 같은 선행을 함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들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함께 의논하기를 '살아서 당대에 은작을 받는 것이 어찌 돌에다 새겨서 수천년이 지나도록 후세에 전하여 사람들이 이를 보고 선을 행하도록 하게 하는 것만 하겠는가' 하고 그 사실을 글로 적어 비를 세웠습니다. 글은 전주 이서하가 짓고 썻으며, 그 외에 최양래, 양세홍 등 여러 사람이 함께 건립에 힘썻습니다.

 

김대건 1822~1846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이며 천주교 103위 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1836년 그가 15세때 프랑스 신부 모방(Maubant,p.)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에서 철학과 신학과정을 이수하고 프랑스어, 중국어, 라틴어를 수학하였습니다. 1845년 귀국하여 천주교 대탄압으로 위축된 교세확장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프랑스 외방전교회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상해로 가서, 완탕신학교 교회에서 주교 페레올의 집전하에 신품성사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1846년 5월 서양 성직자의 입국과 선교부와의 연락을 위한 비밀항로를 개척하다가 순뒤도에 체포되어 그 해 9월 25세의 나이로 용산구에 있는 새남터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용산구를 지나는 도로중 한강대교 북단에서 마포대교 북단에 이르는 도로를 그의 이름을 기려 대건로라 부르고 있습니다.

 

안중근 1879~1910
구한 말의 교육가·의병장·의사(義士)로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망명을 결심 상해로 갔으나국내에서 교육 등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깨닫고 다음 해에 귀국, 1906년 진남포에서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학교 경영에 전념하였습니다. 1907년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을 시작하여 1909년 10월 26일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만주의 하얼빈역에서 저격하였습니다.
일본군에서 잡혀서도 그의 태도와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에 일본인 재판관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으며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 현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효창공원 안에 그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 놓은 허묘가 있고, 용산구 관내의 남산중턱에는 안중근 동산과 기념관이 있습니다.

 

윤봉길 1908~1932
독립운동가·의사(義士)로 1926년 농민계몽·농촌부흥운동·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부흥에 전력하였으며 1930년 만주로 망명, 1931년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거행하는 일본 천황의 생일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상해 일본군 사령관 시라까와 등을 죽게 하고 현장에서 붙잡혀 11월 18일 일본에 호송,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어 같은 해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하였습니다.
효창공원에 있는 삼의사묘에 백정기, 윤봉길, 이봉창의 유해를 안장하였는데 삼의사묘 정문에 「이 곳은 삼의사의 묘소이다. 삼의사는 망국의 설움을 가슴에 안고 청춘을 조국광복에 바쳤기에 그 이름 천추에 빛날 것이며, 그 충의 그 기백 또한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아로 새겨질 것이다」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봉창 1908~1932
독립운동가·의사(義士로 용산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1년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얼마 뒤 김구 선생이 한인애국단에 가입시켜 일본천황폭살계획을 추진, 1932년 1월 8일 일본천황 히로히토가 동경교회 요요끼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꾸라다 문 앞에서 수류탄을 던졌으나 명중시키지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해 10월 이찌가야 형무소에서 사형되었는데, 중국 국민단기관지<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라고 보도하는 등 각 신문들이 대서특필하여 중·일 관계가 매우 악화, 상해사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효창공원 안의 삼의사묘에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며 의사의 생가터가 효창동 118의 1번지에 있습니다.

 

백정기 1896~1936
독립운동가로 호는 구파이며,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사서에 통달하고 식견이 높았습니다.
1919년 8월 경인문의 일본 군사시설을 파괴하려다 사전에 폭로되어 만주 봉천으로 망명하였고, 독립운동자금 조달을 위해 수차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경찰에 구속되기도 하였으며 주로 북경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1928년 5월 초에는 일본상품 배격운동을 지도하였고, 5월 말에는 남경에서 개최된 무정부주의자연맹에 한국대표로 참석했습니다. 1931년 한·중·일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 적의 국경기관 및 수송기관의 파괴·요인사살·친일파 숙청 등을 목표로 "BTP(흑생공포단)'을 조직하여 배일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33년 3월 17일 상해 홍구에 있는 일본요정에서 일본 주중대사 아리요시가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이강훈·원심창과 함께 습격하려 하다가 발각되어 나가사끼 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 받고 복역중 옥사했습니다. 선생의 유해는 효창공원에 있는 삼의사묘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동녕 1869~1940
독립운동가로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 개회민권의 기수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고 1906년 만주 북간도로건너가 이상설·이준 등과 용정에서 「서구의 숙」을 설립,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상동학교를 설립, 교사로 재직하기도 하였습니다.1910년 이시영·이강영과 함께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는데 이 학교가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 13일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을 주도하였고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의 외곽 단체로 대한광복전선의 결성에 참가하는 등 항일전에 투신하여 일생 동안 조국의 광복운동을 하다가 1940년 중국 사변성에서 병사하였습니다.
조국 광복 후 1948년 사회장으로 봉환식을 거행하였으며 효창공원에 안장하였습니다.

 

차이석 1881~1945
차이석은 일명 서입환이고 호는 동암이며, 평북 선천 출신입니다. 1907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평양 대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인재육성에 전력하였습니다. 1911년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옥고를 치뤘습니다.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1935년 2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그 때 비서장에 선출되어 1945년까지 재임하다가 중경에서 병사했습니다.
김구의 주선으로 1947년 유해가 운구되어 용산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김구 1876~1949
독립운동가, 정치가로 1896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는다 하고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를 살해,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어 복역중 1898년 탈옥하였습니다. 1909년 안악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 국무령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1931년에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항일 무력활동을 지휘했습니다. 1940년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여 항일 무장부대를 편성하고 1941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임전태세에 돌입 군사훈련을 지휘 하던 중 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1945년11월 환국,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1948년 남한에서만의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UN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 4월19일 평양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시련을 맞았습니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세워진 뒤에도 민족통일운동을 전개하던 중 1946년 6월26일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습니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에는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가 있습니다. 사단법인 백범기념사업회가 효창동 5의 38에 위치해 있습니다.

 

조성환 1875~1948
1900년 26세때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부패한 군부를 숙청하려다가 발각, 사형을 선고받은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 칙명으로 3년만에 석방된 후, 1907년 안창호·양기택·이갑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했습니다.
1912년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가 만주를 시찰하는 기회를 이용, 암살을 기도하다가 실패하여 거제도에 유배되었으나 1년만에 석방된 뒤,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망명, 서일·현천묵·김좌진등과 군부를 조직하고 1919년 12월에 북로군정서를 개편하여 군사부장에 취임,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39년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으로 서안에 파견되어 중국정부와 협력하여 광복군 창설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임시정부요인과 함께 환국한 뒤 한국장교단장·대한독립촉성회위원장·성균관부총재 등을 역임하다 1948년 병사하여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장형 1889~1964
독립운동가·교육자,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아호는 범정입니다. 1908년에 보성전문학교에 입학, 당시의 교주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과 도산 안찬호 선생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1911년 2월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한만국경선을 넘나들면서 국내 유지인사들을 밀방하여 군자금 조달임무를 수행하기에 신명을 바쳤습니다.
8.15광복 후 1946년 귀국하여 1946년 8월 「국민동지회」회장이 되어 건국 준비에 직접·간접으로 참여했습니다. 선생은 건국사업으로 시급히 서둘러야 할 과제가 육영이라는 점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이고 1947년 11월 1일 광복 후 우리나라 최초의 신규 사립대학으로 단국대학을 설립하여 11월 3일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282번지에 첫 문을 열었습니다. 그 후 1956년 6월 현 캠퍼스인 용산구 한남동에 터전을 마련하여 발전의 기틀을 구축하였습니다. 1963년 건국 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으며, 1964년 12월 74세의일기로 서거하였습니다.

 

박목월 1916~1977
한국문학사에 청록파 시인으로 뚜렷한 업적을 남긴 박목월(본명:박영종)선생은 1916년 경북 영주에서 출생하여 1940년 25세때 『문장』9월호에 "가을어스름""연륜"이 3회 추천 완료되어 문단에 등단하였습니다. 1946년 4월에는 김동리, 유치환, 서정주, 박두진, 조지훈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준비위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3인시집<청록집>과 <박영종 동시집>을 펴냈으며 동시집<초록별>과 어린이잡지<아동>을 편집,발간하였습니다. 1950년 시집<시문학>을 창간하였고 1955년에는 제3회 아시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해 첫 개인시집<산유화>를 펴냈으며, 1960년대초 원효로 4가 5번지에 이사하여 197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수많은 창작활동을 하였는 바, 이시기에 시집<청담>수필집<행복의 얼굴>을 펴냈습니다.
<청담>으로 1968년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하였고 그 외에도 시집<경상도의 가랑잎>, 연작시집<어머니>, 수필집<밤에쓴 인생론>, <구름에 달가듯이>등 수많은 창작활동을 하였습니다. 1969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는 등 한국문학사에 영원히 새겨질 큰 족적을 남기고 1977년 3월 지병으로 별세하여 경기도 용인 모란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선생이 20여년을 살면서 주옥같은 문장으로 수많은 작품세계를 일구었던 용산구 원효로 4가 5번지에는 선생을 기리기 위해 『현대문학 표징』이 새겨져 있습니다.

 

함석헌 1901~1989
종교인이자 민권운동가인 함석헌 선생은 평생을 야인의 자리에서 온갖 박해와 수난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불의의 현실을 꾸짖고 우리 민족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민족의 선각자였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지금도 영원한 민중의 말씀으로 살아 있으며 선생이 지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비롯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등 20여 권의 저서에는 세계에 내놓을만한 한국사상인 씨알사상이 온전히 담겨있습니다.
선생의 삶과 사상을 알리고 민중이 참여하는 민족문화창달을 위해 출발한 "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 사업회"가 원효로 4가 70(회장 이문영, 717-1923)에 있습니다.